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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Architecture Review & Archive

KOWLOON(구룡성채) : 역사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장소

by CLIMATE EQUITY DATA&DESIGN 2023. 10. 30.

 

철거되기 전 과거 도시 계획의 아이콘이었던 홍콩의 구룡 성벽은, 1987년 1㎢당 약 1,255,000명의 주민이 거주할 정도로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곳으로 유명했다. 인구가 늘어난 이유에는, 그 당시에 중국이 이 지역에 대한 건설 규제를 하지 못했다는 점, 영국의 홍콩 지배 당시에 이 지역에 대해서 아무런 법적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세계 2차 대전 중 일본이 이 곳을 점령 했을 때 또한, 이 지역이 비이상적으로 커지는 것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벽으로 둘러쌓인 도시 구룡

 

  구룡지역이 만들어진 송나라(960~1279)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당시에는 이 지역이 '소금' 무역으로 활발한 시기이다.

로마제국 때, 하나의 '봉급'과도 같았던 소금이 그 당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소금으로 송나라는 힘을 키워 갔고, 그 다음 제국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나라를 키워 갔다. 

 

 1898년 영국제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후 식민지로 구룡단지를 점령하고, 이 지역에 전초 기지를 설립했다. 페드로 토리요스의 'Unlikely Territories' (2021) 책에 따르면, 지역의 도시 디자인을 "A marvelous exercise of abandonment of responsibility."로 정의 했다. 그 당시에 벽으로 둘러쌓인 이 지역은, 700명 정도가 살고 있는 작은 지역이 였으며, 심지어 1년 동안의 내부 폭동으로 인해 인구가 150명으로 줄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던 1912년 청나라(1644~1912) 때는, 지금의 홍콩과 중국을 모두 통치하고 있었다. 이후 1933년 이 지역이 탈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규제나 홍콩의 규제 또한 형성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외부로 부터 성장할 여지가 없던 이 지역은, 내부에서 자신들 만의 방식으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법이 없는 도시의 탄생, 치외법권

 

 1933년에 지방 정부가  이 지역의 건물의 상당 부분을 철거했으나, 1940년에는 2000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는 나무 판잣집에서 살게 되었다. 인프라는 늘어나지 못하고, 인구만 200배 증가한 것이다.

 

 구룡지역의 제도적 포기 중일전쟁(1937~1945)과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최고조에 달했다. 전쟁으로 인해 1940년대에 구룡지역은 법을 피해 도망치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무법 도시가 되었고, 불과 몇 년 만에 도시의 인구는 두 배로 늘었고 임시 판잣집 단지가 빠르게 늘어났다. 한때 존재했던 소수의 행정부는 오래 전에 사라졌고, 그들은 스스로를 각자가 지켜야했다. 그러다가 1950년에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3,500가구가 거주하던 판자집의 약 2,500채 불에 탔다. 이후 주민들은 분산되기보다는 구조용 콘크리트와 벽돌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이러한 재료를 통해 그들은 층수가 있는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증축의 증축을 더해서 15층까지 쌓게 되었고, 내부는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가로 세로 각각 30미터 면적에 최대 5만명이 밀집해서 살기 시작했다.

 

 

 

 

 


 

도시의 혼돈이 구룡지역의 철거

 홍콩, 광저우에서 시작된 조직 범죄 집단인 삼합회는 수십 년 동안 이 단지를 통제했다. 실제로 1983년 홍콩 경찰은 구룡 지역 내를 통제할수 없다고 판단했고, 바로 그때 도시 철거 계획이 발표됐지만 이 결정은 거의 10년 동안 연기됐다.

구룡의 옛 유적지인 구룡 성채 도시 공원

 

1993년 3월, 구룡 철거가 시작되었는데, 이 과정은 거의 1년이 걸렸으며 지역 주민들의 상당한 반대를 겪었다. 밀집된 도시에는 마피아, 마약, 불량배, 오물 외에도 가족, 기업, 상점도 있었다. 구룡성채 공원(Kowloon Walled City Park)은 청나라의 옛 성채를 본뜬 작은 공원으로 부지에 건설되었다.

 

 비공식적 지위와 주민들의 상식에 맞지 않는 공공규정과 법률없이 만들어진 위태로운 건축물들은 하룻밤 사이에 철거될 수 없었다. 홍콩은 이 독특한 식민지를 허물기 전에 주민들에게 일종의 주택 솔루션을 제공해야 했고, 27억 홍콩달러(미화 3억 5천만 달러)의 보상 기금을 준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떠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아이들이 옥상에서 웃으면서 뛰어놀았고, 자체적으로 만든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도 있었고, 유치원, 양로원, 이발소, 식당 등등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다 존재해 있었다. 위험과 평화, 희망이 공존하는 곳이였다. 수십 년 동안 거의 무정부 상태에 머물렀던 일부 주민들은 이사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성채에서 강제로 쫓겨나야 했다. 

 


 

구룡의 지속적인 도시 디자인

 

 실제로 구룡시만이 그런 종류의 도시는 아니다. 고대에는 하수도 시스템이나 기본 서비스도 없이 도시, 건물이 서로 겹겹이 쌓인 무질서한 성장이 만연했다. 기원전 5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르와 같은 도시는 좁고, 어둡고, 더럽고, 혼잡한 단지였으며, 모든 형태의 위생이 부족한 집들로 가득 차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의 도시는 좁고, 거리도 없고, 열린 공간도 없고, 구석구석이 가득했다. 창문도 없고 조명도 없는 집은 종종 지붕에 구멍이 나고, 사다리가 세워져 있는 집이 었다. 구룡 시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그것이 해당 도시와 일치하지 않는 기간에 너무 오랫동안 존재했다는 것이다. 즉, 수천 년 전의 도시 디자인 형태가 시간을 거슬러 이동된 것이다.

 

 

 중국과 영국당국이 이 요새를 철거한 지 몇 년 후인 1996년, 일본 다큐멘터리 제작자 팀은 도시의 상세한 단면을 담은 멋진 접이식 펼침면과 함께 '구룡 성곽의 파노라마'를 만들었다.

 

 

 이 단면도 그림은 구룡도시의 복잡성을 표현했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 는 고대의 건물과 다르지 않은 작고 특히 라이브 네트워크로 수천 채의 주택을 연결하는 작은 복도와 계단의 미로였다. 이처럼 구룡지역은 건강에 해롭고 위험하며 범죄율이 높은 곳이었다. 이러한 이유 하나하나가 이 지역과 단지에 거주하는 가족들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지만, 그들에게는 유일한 삶의 터전이기 때문에 철거를 반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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